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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장례식

★★★★☆★☆★☆★☆ 2019. 10.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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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걸 준비하고 있던 중 들려온 외할아버지의 부고소식.
2019.10.22. 별세...

사실 전혀 모르고 있던건 아니었다.
엄마한테 연락을 받았을때 멍- 했지만, 그래도 너무 놀라서 심장박동이 쿵쿵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그냥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않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추석때 할아버지 병문안을 다녀왔고, 그때 할아버지 손을 잡았을때가 생각났다.
꺼칠꺼칠하고 기운이 많이 없으셨고, 진통제를 좀더 강력한 것으로 많이 놓아주면 안되느냐고 간호사에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귀가 잘 안들리셔서 간병인이 할아버지 귀에 대고 소리치다시피 했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그때부터 마음의 준비라는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주일쯤 전인가, 엄마가 말하길 이모가 병문안갔다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간호사가 뉘여주면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불편한 자세로 멈춰있으셨다고 한다.
누가 눕혀준다면 눕고난 뒤 본인이 편한 자세대로 뒤척거리기라도 하는게 일반적인데 할아버지는 뒤척이는 것마져도 힘이 드셨던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엄마는 당일에 바로 장례식장으로 갔고, 나는 다음날 아침에 출발했다.
1박 2일간 경험한 장례식은 정말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그나마 우리 친척들이 대가족이니까 덜 힘들었던거라 생각한다.
동생은 바깥에서 일손돕다가 애들이랑 놀아주기를 했고 나는 어느정도 조문객 발길이 멈췄을때쯤 부의금 봉투를 열어 방명록과 부의금 작성하는 작업을 했다.

엎드려서 쓰는 내가 안쓰러웠던 우리아빠는 내가 허리다칠까봐 큰 상을 가져가주셨다.
목록을 쭉 쓰면서 5만원,10만원,20만원,30만원,50만원 이정도 금액대를 보았던 것 같다.
누군가 이게 다 빚이라는 말도 했는데, 어릴때는 무슨말인지 몰랐던 말들이 나이가 들수록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부의금 봉투를 나도 받았는데 뭐랄까... 안주셔도 되는데 받아서 이래도 되는건가 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인 기분이 들었다.
회사분 배려로 나에게만 따로 전달되었는데, 챙겨주신 분들께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라 따로 찾아뵙고 돌려드리도록 해야겠다.

부의금 작성을 다 끝내고 상주가 쓰는 대기실에 누워서 쪽잠을 자다가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어서 일어났다.
새벽 4시30분쯤 깬것 같다. 엄마가 안자고 일어나계셨는데 이모들이랑 이야기 좀 나누다가 5시쯤부터 장례식장 직원들이 출근하는걸 보고 짐을 정리했다.
짐정리해서 남은 음식이랑 용품은 삼촌이랑 외숙모가 이모네 식당 냉장고로 옮기러 다녀오고, 나머지 떡이랑 전들은 장지에 가는 버스에 싣는다고 그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5시가 되고 장례식장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냈다.
전통을 엄청나게 중시하셨던 할아버지셨기에, 상주인 외삼촌들은 상을 치르는 동안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제사 이후 이동한 화장터.
눈물이 안났었는데 여기서 터져버렸다.
화장터분위기도 너무 엄숙했고, 여기서 고인과 마지막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다며 관에 손을 맞대고 인사를 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손을 대는 순간 눈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상중 제사를 지내는 내내 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외며 외할아버지가 꼭 좋은곳으로 편하게 가시길 기도했다.
내가 하느님께 기도했지만 가족 누군가는 다른 신께 기도했을것이고, 신들 중 누구 한분께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할아버지는 편안하게 가실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화장시간이 생각보다 오래걸렸고 가족들이 대기하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 방에 있는게 답답했던 몇명은 복도로 나왔고 복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셔도 졸음을 참을수가 없어서 약간 졸다가,,, 화장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가족들이랑 다시 이동을 했다.

여기서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다 탄 뼈를 확인하라는 안내를 받았고, 이모들과 삼촌, 이모부들 사촌들과 그 좁은 유리창 너머에 있는 유골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다 타서 흰 뼈가 되어버린 모습에 눈물이 또 나왔다. 그리고 불에 타면 흰 가루가 되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뼈조각이 되는 것이고, 그 유골을 유족들이 확인하고 나서 화장터에서 기계로 그 뼈조각을 뼈가루로 만드는 작업을 또 하는 것이었다.


호국원까지 나는 동생이랑 차를 타고 갔는데, 가는길이 너무너무 험란했다.
화장터에서 받은 충격을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동생은 우리 가족이 워낙 대가족인지라 뒤에 서있어서 뼈조각은 못보았다고 했다.첫날 밤에 도착한 동생은 다음날 아침에 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는데, 아마 내가 보았으면 놀랐을거라고 했다. 충격에 의연한 내동생...


호국원에 도착하고 합동장례식이 치뤄졌고, 장례식이 끝나고 장지에 행렬로 따라나섰다.
장지는 햇빛도 짱짱하게 잘드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좋은 곳에 쉬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습하고 답답한 곳으로 가게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안치된 것을 보고나서 호국원 실내에 있는 방같은 곳으로 다시 안내를 받았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 탈상이라는 의식(?)을 했다.
이로서 모든 장례식은 끝이났다.

나는 이를 마지막으로 서울로 돌아왔고, 다음날 일상으로 복귀했다. 복귀하고 하루를 보낸뒤 회상해보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닌 우리 가족들!
어른들(외삼촌들 외숙모들, 엄빠, 이모들 이모부들)은 다시 왔던 버스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가서 또 저녁식사까지 하고 끝 마무리를 하셨다고... 난 화수목까지, 어른들은 금요일까지 함께하신듯.

이번 장례를 치르고 느낀건 우리 가족들이 정말 우애가 깊은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가족이라는건 평소 연락이 소원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면 모여서 합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다들 바빠서 경조사가 있을때나 만나는 사촌들(사촌오빠, 사촌동생들 일부는 진짜 오랜만에봐서 못알아볼뻔)이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좀 어색하더라도 나중에 만날일이 또 있다는 것.
자주자주 연락하고 만났으면. 나부터 잘해야겠다.

장례식을 통해 피가 왜 물보다 진하다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이런걸 느끼다니...


장례식은 몇번 가본 정도라서 익숙하지 않은데, 상주(?)가 된 입장에서도 익숙해지기는 힘든 것 같다.
가족이 많아서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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